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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아소를 운영하던 그녀의 숨겨진 모습

2019. 9. 2. 12:33범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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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들은 모두 잔혹하다지만 그중 가장 잔혹한 자들을 꼽으라면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아이들을 타겟으로 삼는 이들일 것이다.

 

아멜리아 다이어’. 그녀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20년동안 그녀의 손에 사망한 아이들은 30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녀는 자신의 살인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아이들을 ‘돌보았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아멜리아 1836,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구두장인으로 소문난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학창시절에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시쓰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어머니 ‘사라 장티푸스에 걸리고 만다. 고열에 시달리던 ‘사라 깨어났을  평소 인자하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고열이 그녀의 뇌에 영향을  것일까? ‘사라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였고 ‘아멜리아 비롯한 아이들을 매일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구타가 얼마나 심했던지 ‘아멜리아  동생이 죽음에 이르고 만다. 구타로 몸이 약해져 있던 그녀들은 병에 쉽게 걸렸고 결국 사망한 것이다.

 

아멜리아 우울증에 시달렸고 급속도로 말수가 줄었다.  년간 지속되던 폭력도 어머니가 사망하자 사라졌지만 ‘아멜리아역시 마음속 무엇인가 사라져 있었다.

 

1859, ‘아멜리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업을 오빠인 ‘제임스 이어받았고 평소 오빠랑 자주 다투던 ‘아멜리아 집을 나와 혼자 살게 된다.

 

조지 토마스’(50)라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그녀(24) 간호 학교에 들어가길 원하였고 ‘조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간호사 교육을 받고 졸업한 그녀는 탁아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혼 여성의 임신은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태어난 아기들은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던 시기였다.

 

이런 미혼모들의 수가 증가할 수록 ‘아멜리아 탁아소 사업은 번창하였다. 그녀는 광고를 내며 많은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하였고 세련되고 예의 바른 모습에 많은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도 한명이 여러명을 돌본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하지만 부가 축적되는 것을 보면서 ‘아멜리아 한계치 이상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탁아소에서 사망한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의료시설도 열약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병에 취약하였기에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도 그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망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유아 사망에 일부 책임(태만) 있다며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는 심한 육체 노동에 시달렸고 과거 어머니에게 폭행 당하던 것을 떠올렸는지 정서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번이나 자살기도를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정신 병원으로 보내진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한 그녀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다시 탁아소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아멜리아 가명을 사용하여 탁아소를 운영하며 언제나 좋은 ‘엄마인척을 하였으나 그녀의 탁아소에서 사망하는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지역을 자주 옮겨 다니며 무려 20년동안 300여명의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기들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테이프로 아이들의 목을 강하게 감싸고 사망할 경우 근처 강에 유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렇게 사망한 아기들은 의사들에게 확인을 받았지만 당시 의학으론 아기가 사산 되었는지 살해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지방 경찰들 역시 범인을 잡을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템즈강에서 목에 테이프를 두른  아기의 시신이 발견된다. 여느때와 다르게 아기의 목에 감겨있는 테이프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1896, 경찰은 테이프의 주소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탁아소를 운영하던 ‘에밀리아 만나게 된다.

 

경찰은 가명을 쓰고 탁아소를 운영하던 그녀를 체포하였고 심문하며 과거를 조사해본 결과  과거에도 동일한 전과로 징역형을 받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시신을 강에 유기한 것은 맞지만 그저 돌보다 아이가 죽어 그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재판장은 교수형을 선고하였고 1896 6 10, 그녀의 형이 집행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는  말이 없다였다고 한다.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아이를 맡긴 어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300~4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