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5. 13:23ㆍ미스터리 & 공포
안녕하세요
오늘은 1945년에 일어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에 관하여 가져왔습니다.
항상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상본과 캡쳐본은 동일내용을 담고있으니 편하신걸로 감상해주세요
1945년 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 본토에 전략폭격과 함께 기뢰를 이용하여 해상을 봉쇄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때 사용되었던 기뢰의 수는 약 11000개로 당시 670척 이상의 함선들이 이 기뢰에 의해 침몰하였다고 한다.
기뢰는 지나가는 선박들의 자기감응 또는 기계음의 통과 횟수를 카운트 하여 신관이 작동하도록 설계되었기에 일본군의 잠수함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선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였고 이렇게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 당시 일본에 강제징용되어 노동을 하던 한국인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인 난민의 이송‘이라는 극비 명령을 해군성에 발령해 당시 오사카 상선에 소속되어 있던 4700톤급 화객선 ’우키시마호‘에 한국인들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배에 오르지 않으면 영영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배급도 없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었고 3735명이 배에 오르게 된다.
일본이 발표한 것이 3735명이지만 당시 탑승자 명단을 작성하지 않았었고 배에 탑승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8000명은 되었을 것이라 한다.
8월 22일 오후 10시, ‘우키시마호‘는 ’오츠항‘을 출항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미군이 설치해둔 기뢰가 일본의 해안선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며 목적지인 부산을 향해 나아갔다.
출항 후 일본 해군 운수본부로부터 ‘우키시마호’의 함장은 무전을 하나 받게되었다. 무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부산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 날 가장 가까운 항구로 입항하라.”
정해진 날짜에 도착하기 힘들것이라 판단한 함장은 중간에 있는 ‘마이즈루 항’에 입항하기로 결정하였고 ‘마이즈루’에 연락을 하였다.
당시 무선 상황이 좋지 않았던 탓에 ‘우키시마호’를 선도지시해줄 소해정이 마중나오지 않았지만 이를 기다리지 않고 해안으로 입항을 시도한다.
잠시 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우키시마호’의 선체가 두 동강 나며 ‘마이즈루’ 앞바다에 침몰하고 만다.
일본은 사고조사에서 사망자가 조선인 524명, 일본인 25명이고 사고 원인은 미군이 설치하였던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 발표하였다.
폭발소리를 듣고 어민들이 어선을 몰고 나와 생존자들 구조하였고 사건 이후 부패해 떠오른 사망자들은 수거작업을 통해 한곳에 모아져 화장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골은 전후 혼란으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고 도쿄의 사찰인 유텐지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가지고 일본측과 한국측의 주장은 달랐다. 일본은 ‘우키시마호’의 침몰이 기뢰에 의한 사고이며 일본의 적극 조치로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한국은 ‘우키시마호’의 침몰은 전범재판을 두려워한 일본인의 계획적인 범죄라 주장하였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일본 해군이 탑승자들(조선인)을 갑판으로 유도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생존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배 밑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배 밑으로 내려가는 사이 해군들은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였고 잠시 후 사고가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생존자들은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였는데 만약 기뢰가 터졌다면 큰 폭발음이 한번 들리고 수십 m의 물기둥이 나타나야 하지만 당시 사고에서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후에 일본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했을 당시 선박 밑 부분에 폭발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선체가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내부 폭발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우키시마호’가 ‘오츠항’을 떠나 부산으로 가려면 동해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뢰가 설치되어 있던 일본 해안을 따라 내려갔고 결국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우키시마호’의 침몰은 큰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은 침묵하였고 이에 일본정부가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고
‘우키시마호’가 침몰 직전에 일본 해군들이 미리 탈출한 점, 배의 밑 바닥에는 화물이 아닌 360톤의 돌이 실려 있었던 점을 들어 계획적인 범죄라는 주장도 나왔다.
1992년에 ‘우키시마호’ 사건에 관하여 한국인 생존자 21명과 유족 59명이 일본측에 배상금과 유족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였다.
2001년 교토 지방재판소는 그들의 주장 중 일부를 국가의 책임이라 인정하였지만 2004년 5월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선 미군의 기뢰에 의한 침몰로 확정 지어 일본의 책임은 없다고 판결내었다.
일본정부는 지금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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