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4. 09:27ㆍ범죄자 이야기
1961년 3월 28일, 일본 미에현 나바라시의 쿠즈오 마을,
그날은 마을의 새 임원 선출 및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공민관에 모여 회의를 마친 뒤인 저녁 8시 무렵.
남성들에겐 청주를, 여성들에겐 백포도주를 나눠주며 회장의 건배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됩니다.
음식과 술을 마시며 사람들은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고
그날도 그렇게 내일을 기약하는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회장의 아내가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4명의 여성이 덩달아 같은 증세를 보이며 쓰러집니다.
곧이어 다른 여성들도 복통을 호소하며 연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구급대원이 도착했을 때는 첫 증상을 보였던 5명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여성들이 보였던 것은 중독 증상. 누군가 그녀들이 먹었던 음식이나 술에 독을 탔음이 분명했습니다.
여성들만 먹은 것…… 그것은 백포도주뿐이었습니다.
앞선 5명의 경우 백포도주를 많이 마셨기에 증상이 빠르게 나타났지만
다른 이들은 천천히 마셨기에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백포도주에선 TEPP계 농약이 검출됐고
경찰은 당시 백포도주를 운반했던 마을 남성 3명을 집중 조사했습니다.
3일간의 강도 높은 심문 끝에 1961년 4월 2일,
오쿠니시 마사루라는 마을 남성이 자신의 범행이라며 자백 합니다.
검찰은 오쿠니시가 마을 주민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를 아내가 알아채자
모든 것을 청산할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합니다.
사건 당일 회장의 집에서 공민관까지 술을 나르게 된 오쿠니시. 동행하던 마을 주민은
깜빡 잊은 것이 있다며 되돌아갔고 오쿠니시는 홀로 공민관으로 향합니다.
10분 후 마을 주민이 돌아왔고 그때부터 회의와 연회 준비를 위해 다들 공민관을
오가며 일했기에 검찰은 이 10분간 오쿠니시가 술에 농약을 풀었다 주장했습니다.
오쿠니시 또한 자신이 닛카린T라는 농약을 대나무통에 따른 후
농약병을 강물에 버려 증거를 인멸했다 자백했습니다.
백포도주에 농약을 따를 당시 뚜껑을 이빨로 땄다는 그의 자백에
검찰은 치열 감정을 위해 전문가에게 의뢰했습니다.
전문가 6명중 3명은 오쿠니시의 치아가 맞다는 결론을,
나머지 3명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검찰은 이를 물적 증거로 채택합니다.
또 다른 물적 증거는 없습니다. 오쿠니시의 자백과 검찰의 억지 물증만이 남아있는 사건이었죠.
이 상태에서 오쿠니시는 강압적 수사에 의해 자백을 강요당했다며 자백을 번복합니다.
오쿠니시가 했던 자백 중에 강물에 떠내려가는 농약병을 보았다는 것과
대나무통을 품안에 갖고 있었다는 내용이 그의 자백 번복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농약병의 경우 그가 버렸다고 말했던 강물에 동일 종류의 병을 수십 차례 버려본 결과
모두 가라 앉았던 점이 그가 떠내려갔다고 자백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았고
대나무통의 경우 옷으로 감싸고 있을 시, 대나무 성분이 옷에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가 입었던 옷에서는 대나무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던 겁니다.
1961년 12월 23일, 지방재판소는 치열 감정의 증거가 불분명한 점,
오쿠니시를 비롯해 마을 주민들의 진술이 지속적으로 번복되는 점을 바탕으로 무죄를 선고합니다.
하지만 1969년 9월 10일, 고등재판소는 원심 판결을 뒤집고
오쿠니시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심문 당시 오쿠니시의 자백은
판결을 내릴 만한 신뢰성이 있다는 것이 고등재판소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오쿠니시는 사형수 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1973년부터 2013년까지 8번의 재심청구를 신청했지만 항상 기각당했습니다.
그 사이 오쿠니시를 지지하는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그를 구명하기 위해 사건을 파헤쳤습니다. 24
그들은 검찰이 제출한 치열 감정 사진이 날조됐다는 것을 알아냈고
백포도주에 들어있던 농약이 닛카린T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실제로 닛카린T는 TEPP계열은 맞지만 색이 진한 붉은색으로
백포도주에 섞을 경우 색이 변하기에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게 재심이 결정되나 싶었지만 고등재판소는 증거에 대해 의심을 가질 부분이 없고
피고의 자백은 신뢰성이 높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재심취소결정을 내립니다.
2015년 5월 15일, 오쿠니시는 9차 재심청구를 했지만
그해 10월 4일, 폐렴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그의 재심청구는 자동 기각됩니다.
엔자이寃罪(えんざい). 원죄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라는 시사용어로 쓰입니다.
일본 형사소송법 제336조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의 유죄판결률은 99%가 넘는다고 합니다.
심문과 재판 전 구금은 일본의 유죄판결률이 높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형사재판에 대한 다수의 유죄 판결은 자백에 근거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일단 체포되면 용의자들은 보통 경찰 당국의 통제 하에 23일까지 구금이 가능하며
밀폐된 공간에서 장기간 심문을 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이 심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일본 재판부는 관행이라 말하며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법원은 일반적으로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경향이 강하며
피고의 자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방식은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오쿠니시는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유가족들과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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