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이야기] 사망보험에 가입되어 있던 애인의 실종, 수령인은 남자친구의 어머니?
1965년 4월, 싱가포르의 법원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남성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남성의 이름은 서니 앙 수 수안. 인근 나라를 포함해 싱가포르에서 처음 열린
시신 없는 첫 재판 사례로 기록된 이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중산층 출신에 똑똑했던 서니는 1957년에 비행사가 되는 꿈을 안고
장학금을 받으며 훈련을 받았지만 안전 규정 불이행으로 퇴소 당하며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뒤 싱가포르 그랑프리에 참가할 정도의 레이서로 실력을 쌓았지만
운전 중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하면서 체포됐습니다.
1962년에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되며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그는
같은 해 법학 학위 취득을 위해 대학에 다녔고 영국에 유학을 갈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탕진하며 그는 모든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던 건 이 시기였습니다.
1963년 6월에 서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매달 90달러를 버는 22살의 이혼녀
제니 처크 청 키드를 만나게 됩니다.
순진하고 소박했던 제니는 억지 결혼 후 이혼으로 상처 입은 자신을 챙겨 주는
서니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1963년 8월 27일, 두 커플은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싱가포르 남쪽에 위치한
시스터즈 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오후 2시 30분에 항구에서 유수프 아마드의 보트를 대여한 두 커플은
그의 안내에 따라 섬 인근 산호가 있는 스쿠버 다이빙 포인트로 이동했습니다.
해협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안내용 밧줄을 설치한 뒤
그들은 스쿠버 다이빙을 준비 했습니다.
처음에 물속으로 들어간 것은 제니였습니다. 그녀는 비상용 도끼와 칼,
무게 조절을 위한 벨트를 착용했고 홀로 다이빙을 했습니다.
10분정도 지난 뒤 제니가 올라왔고 산소통을 교체한 뒤 다시 잠수를 할때까지도
서니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유수프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실 두 커플은 두 달 전에도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서니만 잠수를 했었고 제니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며 수영만 즐기다 갔었죠.
그런 그녀가 두 달 만에 찾아와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된 겁니다.
즉 제니는 초보였습니다. 초보를 홀로 보낸 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을 초래할 수 있었는데
정작 같이 온 서니는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유수프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서니는 그를 불러
자신의 산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도와달라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산소통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산소통이 새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임시적으로 고치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산소통을 손보고 있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잠시 후 서니는 유수프에게 제니가 올라 올 시간이 지났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봅니다.
당시에 그들이 가져갔던 산소통으론 오랜 시간 잠수를 할 수 없었기에
이미 올라왔어야 할 그녀가 아무 소식도 없자 그들은 안내용 밧줄에 신호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니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유수프를 바라보고 있던 서니는
그에게 어떻게 하냐 물었고 그들은 결국 인근 섬으로 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섬으로 가는 동안 유수프는 서니가 전혀 당황스러운 모습도 아니었고
급하게 서두르지도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섬에 도착해 서니는 경찰에 신고했고 섬에 있는 전문 다이버 5명을 데리고
보트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유수프는 또 한번 이상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섬으로 가는 동안 서니가 잠수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던 겁니다.
애인이 물속에서 실종됐고 비상 잠수 장비가 있는데도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죠.
전문 다이버들이 제니가 실종된 장소로 이동해 그녀를 찾기 위해 잠수 할 때도
서니는 전혀 다급해 보이지 않았고 물에 들어가 애인을 찾을 생각도 없어보였습니다.
잠시 후 해경이 도착해 수색 작업을 펼쳤지만 제니의 흔적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수색 작업 8일만에 그들은 인근 지역에서 제니가 사용했던 오리발 하나를 발견합니다.
오리발에는 깨끗한 두 개의 절단면이 남아있었는데
이는 마치 누군가 고의적으로 칼이나 가위를 이용해 자른듯한 모양새였다 합니다.
전문가는 오리발에 남아있는 절단면이 산호에 의해 생길 수 없는 형태이며
잠수 중 오리발에 이러한 손상이 생기면 이동성과 방향성에 손실이 올 수 있다 주장했습니다.
제니가 스쿠버 다이빙을 했던 시스터즈 섬 주변은 해류의 흐름이 빠르기에
초보자가 스쿠버 다이빙을 하기에는 좋지 않은 장소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 초보자 홀로 스쿠버 다이빙을 하도록 유도하고 본인은 정작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전혀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서니를 검찰은 수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검찰은 제니가 막대한 사망 보험에 가입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령액은 40만 달러, 2020년 기준 대략 2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수령인은 서니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막대한 보험료의 수령인을 남자친구 어머니로 설정해 놓을까요?
수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에 서니와 제니는 여행을 떠나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그만 개를 피하려다 충돌 사고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니가 타고 있던 조수석은 크게 망가졌지만 다행히 타박상만 입었던 사고.
그랑프리에 나갈 정도로 운전 실력이 뛰어났던 그가 낸 사고 치고는 너무 이상했습니다.
제니가 들었던 보험들은 대부분 ‘124 보험’이라 불리는 것으로
자연사일 경우 두 배, 사고사일 경우 네 배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지불하는 상품이었습니다.
모든 보험들은 고액의 단기 보험들 뿐.
실제로 한 보험은 그녀가 실종된 8월 27일 2시에 만료되는 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보험마저 만료되기 전에 서니가 5시간 연장 신청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검찰은 그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애인을 위험한 곳으로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습니다.
1964년 12월 22일, 결국 검찰은 살인 혐의로 서니를 기소했고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는 가운데 그의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검사는 앞선 의문점을 말하며 제니가 실종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서니가 보험사에 연락해
보험금 지불을 요구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검사는 지속적으로 그에게
왜 제니를 찾기 위해 직접 물에 들어가지 않았냐며 추궁했습니다.
다음은 재판 당시 검사와 제니와의 문답을 재연한 내용입니다.
당신은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말했었죠? 결혼까지 할 생각이셨다고요?
-네
그런데 왜 그녀를 찾기 위해 직접 잠수하지 않았나요?
-제니가 보트 주변에 있었다면 기포가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기포는 없었어요.
기포가 보이지 않아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유수프씨에게 부탁해 인근 섬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떠났다는 거죠?
-그렇죠.
기포가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번쯤 잠수해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았나요?
-산소통에 문제가 생겼었어요. 그래서 전 그날 잠수도 못했고요.
듣기로는 보조 산소통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하던대… 아닌가요?
-있긴 했지만 그걸로는 산소량도 부족하고 아까 말했듯이 기포도 안보여서……
게다가 전 그녀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상어에게 공격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부르게 물에 들어갈 수 없었죠.
언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셨죠?
-섬으로 향할 때 갈아입었습니다.
그럼 결국 당신은 그녀를 찾으러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전문 잠수부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어요. 제가 들어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전 사실 그녀를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건 무슨 뜻이죠?
-….그냥 거기는 원래 해류가 빠르고 위험해서…
그런 장소로 애인을 데려갔고 홀로 스쿠버 다이빙을 시켰다는거죠?
-아니 전 장비가 고장이 나서 그랬다고요.
왜 초보자인 그녀를 먼저 물에 들어가게 했죠?
-Lady first니깐요…
그렇군요. 위험한 곳에도 여성을 먼저 보내는 신사셨군요.
검사는 서니가 사전에 스쿠버 다이빙을 통해 위험한 장소를 물색했고
제니에게 고액의 단기 보험을 들도록 한 뒤 사고를 유도한 거라 주장했습니다.
그전에 있었던 자동차 사고 역시 제니의 사고사를 유도했지만 그녀가 사망하지 않자
결국 스쿠버 다이빙을 하자며 미리 오리발에 칼집을 만들어 사고사를 유도한 거라 생각했습니다
1965년 5월 18일, 배심원 만장일치로 서니는 유죄를 평결 받았고
판사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서니는 물적 증거 없이 범인으로 몰아선 안된다며 항소했고 그의 지인들은
3,000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을 올렸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유소프 빈 이샥은 청원서를 거부합니다.
1967년 2월 6일, 서니의 형이 집행됐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정황증거만으로 사형을 당한
최초의 판례로 남은 이 사건은 후에 대중 매체로 소개되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과연 그가 돈을 노리고 범죄를 저지른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누구나 의심할 만한 상황이 겹친 상태로 그런 사고가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선량한 사람일지 잔혹하고 악랄한 범죄자일지는 서니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사라지길 바라며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